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철주성 전투 (문단 편집) == 소개 == [[고려]] [[고종(고려)|고종]] 18년인 1231년, 권황제 [[살리타이]]가 이끄는 3만의 [[몽골군]]이 침입해왔다. 이에 함신진을 점령하고[* [[압록강]] 하구의 관문이었다. [[조충(고려)|조충]](趙沖)의 아들 조숙창(趙叔昌)이 방수장군(防守將軍)으로 보직을 맡고 있었으며 살리타이가 항복을 권하자 "성안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저 요구를 받아 들여야 된다"는 부사(副使) 전간(全間)(전간은 이후 함신진에 머물다가 성 내 몽골군들을 죽이고 성 내 백성들을 개경으로 피난시켰으나, 전간은 가족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개경으로 가다가 익사했다.)의 건의에 따라 투항했다. 이 때문에 조숙창은 《[[고려사]]》에서 반역 열전에 이름을 올렸다.] 도달한 곳이 바로 철주성이었다(現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 || [[파일:attachment/gangdongyukju1.jpg|width=100%]] || || 철주성은 강동 6주의 성중 하나로 굉장히 중요한 요충지였다. || >壬午 蒙古元帥撒禮塔圍咸新鎭 屠鐵州。 >임오일, 몽고 원수 살리타이가 함신진을 포위하고 '''철주를 철저히 짓밟았다.''' >---- >《[[고려사]]》 고종 18년(1231년) 8월 임오일 기사 ---- >高宗十八年 爲靜州分道將軍 蒙古兵渡鴨綠江 屠鐵州 侵及靜州。 >고종 18년(1231년) 정주(靜州)[*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 분도장군(分道將軍)으로 있을 때 [[몽골군]]이 [[압록강]]을 건너 '''철주를 짓밟고''' 정주까지 침범해왔다. >---- > 《[[고려사]]》 [[김경손]] 열전 이 날 전투에 대한 경과는 《동국여지승람》에 등장한다.[* 권 53 철산군조 및 철산 군지 73면] 몽고군이 침입했다는 소리를 들은 철주방어사(鐵州防禦使) 이원정(李元禎)과 판관 이희적(李希勣)은 몽고군이 기병 위주의 편성이라는 점을 감안해 군민들과 병력 2,500명을 평지에 위치한 철주읍성에서 철주성으로 이동 시켰다. 함시진을 포위한 병력은 놔두고 철주성에 도착한 살리타이는 그들이 사로잡은 고려의 서창낭장(瑞昌郎將) 문대(文大)에게 철주성을 향해 "항복하라"라는 말을 하도록 했으나 문대는 이를 따르지 않고 "항복하지 마라!"라고 외쳤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문대의 말은 다소 기묘했다. 살리타이가 "진짜 몽고군이 왔으니 빨리 항복하라!"라고 외치게 하자 문대는 "가짜 몽고군이니 항복하지 마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에 빡친 살리타이는 "항복하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니놈 목을 따버리겠다."라고 했으나 문대는 또다시 "항복하지 마라!"라고 외쳤고 죽음을 맞이했다. 보름 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보름이란 이야기는 아래에 나오는 시(詩)인 『과철주(過鐵州)』에만 등장한다. 다른 기록에는 찾아볼수가 없다.] 식량이 떨어졌지만 이원정과 판관 이희적은 끝까지 싸웠고 더이상 버티지 못하자 이원정은 화약고에 불을 놓아 처자와 같이 불길에 뛰어들어 자결했고 이희적은 성안의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창고 속에 몰아넣고 불을 놓아 살해한 후 자신도 남아있는 남자들과 모두 자결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